2010. 10. 30.

김덕령 장군의 자취를 따라서 무등산 역사길(무등산옛길3구간)

무등산 옛길은 1구간,2구간,3구간으로 나뉘고, 다시 3구간은 나무꾼길과 역사길로 나뉩니다. 그 중에서도 무등산 역사길은 이 모든 구간 중에서 단연 강력추천의 구간입니다.
출발지인 충장사에서 종점인 환벽당까지는 평균 2시간 남짓이면 걸을 수 있는 거리이지만, 주변을 사색하며 걷게 만들기에 넉넉하게 3시간 정도 예상하세요. 충효마을 건너 담양에 위치한 가사문학관, 식영정, 소쇄원까지 코스를 잡으면 해질녁에서야 돌아간다고 보면 됩니다. 역사길의 출발은 충장사 입니다.


아래 지도는 iMapmyHike 앱을 이용하여 아이폰에서 GPS로 찍은 후에 kml파일을 구글맵으로 옮겨 만들었습니다.


큰 지도에서 무등산 옛길 3구간-역사길 보기

충장사는 임진왜란때 담양을 중심으로 의병 5,000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묘역입니다. 아시다시피 김덕령 장군은 빛고을 광주 역사의 중심에 있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 곽재우 장군 등과 함께 왜군에 맞서 많은 공을 세웠지만 모함에 몰려 옥사하셨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김덕령 장군이 선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순신 장군 역시 앞날을 예견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충장사 안내도

충장사 입구에서

충장공 김덕령 장군 묘역


충장사의 소나무


충장사를 뒤로 하고 역사길의 진입로에 들어 섭니다.


역사길 나들이를 시작합니다

걸음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사촌 김윤제의 재실(귀후재)이 맞이 합니다. 김윤제는 오늘 여행의 종착지인 환벽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한 학자로, 송강 정철, 김덕령 장군의 형제 등의 스승에 해당하는 분이라 합니다. 제가 찾았을때 등산화 한 켤레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안에 계셨지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사촌 김윤제 재실

누군가 집안에 있습니다 ^^

계속해서 걸음합니다. 고즈넉한 숲길을 벗어나니 지진관측소가 보이고, 곧이어 원효계곡이  가을을 한껏 느끼게 해줍니다.



지진관측소

낙엽을 머금은 원효계곡

원효계곡을 끼고 몇걸음 더하니 풍암정이 눈에 들어 옵니다. 풍암정은 김덕령 장군의 동생 김덕보가 머무르며 학문하고 후학을 키웠던 정자입니다.

풍암정

풍암정 현판

풍암정 전경

김덕령 장군은 3형제 였고,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당시 상중이었다 합니다.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지키자는 주위의 권유에 김덕령은 상중이라 나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합니다.

"임금이 욕을 보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신하가 죽는 절개를 바쳐야지 어찌 효를 굽혀 충을 펴는 것이라 해서 어렵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형제가 마땅히 함께 국란에 나서야 하겠지만, 여막을 지킬 사람이 없으니 형님은 국난을 평정하러 나아가십시오. 아우가 여막을 지키겠습니다."

아우 김덕보는 형의 기병을 독려하였다고 합니다. 맏형 김덕홍 역시 의병활동을 하다 고경명 장군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둘째 김덕령 장군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장살형(매맞는 형벌)으로 옥사하였고, 김덕령 장군의 부인은 정유재란때 왜적의 화를 피하다가 담양 추월산에서 순절하였으니, 살아남은 막내 김덕보의 마음은 어떠 하였을까... 그것도 역적 집안이라는 오명까지 안고서...
정자에 앉아 있으니 물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립니다.

풍암정의 이러한 내력과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은 송강 정철의 네째 아들인 기암 정홍명의 풍암기에 잘 표현되었다 하니 검색해 보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1998년도에 이 일대를 정비하면서 풍암정 건너편에 화장실을 세우고 벤취를 몇개 놓았습니다. 산수동에 사는 한 아주머니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발적으로 이곳을 청소하고 계시다니 만나게 되면 꼭 인사를 건네시기 바랍니다.

굿당바위

원효 계곡의 물과 바위를 뒤로 길을 재촉하여 굿당바위를 지나 숲을 벗어나니 들판이 보입니다.

숲길을 벗어나니


길 왼편에 도자기를 만들던 가마터인 충효동 도요지가 발걸음을 이끕니다.

충암동 도요지

가마터

전시실

금곡마을 사거리는 무등산 둘레길인 무돌길 코스에도 지나는 마을입니다. 혹시 무돌길 산책 중에 금곡마을을 지나는 분은 다음 코스를 하천 건너편 원효숲길로 가지 마시고, 여기서부터 역사길을 따라 갈것을 추천합니다.  충효마을을 향해 계속 가봅니다.

금곡마을


도요지에서 내려다 본 금곡마을 전경


역사길 이정표






너른 들판을 지나

충효분교가 보이고

정자

복지관을 지나면

충효마을에 도착

금곡마을을 지나 뒷산 숲길과 너른 들판을 지나면 충효분교가 보이고, 충효복지관이 나오면 충효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
맨먼저 찾아볼 곳은 김덕령 장군 생가터 입니다. 현재 공사중이고 입구의 푯말조차 없습니다.

김덕령 장군의 생가터

비문이라도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뻔 

마루에 앉으니 멀리 무등산이 보입니다

공사중인듯 한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충효동 정려비각

충효마을은 석저촌이라는 이름이었다가, 정조에 이르러 김덕령 장군가의 충효를 높이 사서 충효리로 이름을 내리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비각(충효동정려비각)을 세워다 합니다.
지도를 좁히시면 이 충효마을의 북서쪽 가까운 곳에 518민주묘지가 있는 망월동이 보입니다. 김덕령 장군과 망월동은 조선시대에서 현대로 이어진 광주의 역사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김덕령 장군 생가터 마당에서 뒤돌아 서면 무등산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무등산은 이 모든 역사를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보았겠지요. 이제는 지쳐서 혼자 힘으로는 가지를 이기지 못하는 왕버들나무와 함께...

왕버들나무

가지가 무겁다네요 ^^

뒷편 안내실에 들러서 팜플렛 챙기세요

호수생태원은 별도의 포스팅을 따로 하겠습니다. 이곳에서만 1시간 넘게 산책하였습니다.


드디어 환벽당 입구 표지판이 보입니다.

환벽당 입구

역사길 종착지점 안내문

무등산 옛길 3구간(역사길) 마지막 지점 안내문도 보입니다만, 들러봐야 할 곳은 아직 남았습니다. 먼저 환벽당에 도착했으니 환벽당을 둘러봐야죠.

환벽당





환벽당은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입니다. 역사길을 시작하자마자 김윤제의 재실(제사모시는 곳)을 보았죠. 환벽당은 나주 목사(지금의 군수)였던 사촌 김윤제가 을사사화 (조선 중종때 일어난 친인척의 권력싸움)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환벽당을 세우고 은거하며 학문하던 정자로, 송강 정철과 충장공 김덕령 장군도 이곳에서 학문하였다 합니다.
지금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고, 주위에 울창한 푸른나무로 둘러 싸여 있어서 환벽당이라 이름하였다 합니다.(아래 사진) 원래는 소나무 뿐만 아니라 대나무가 울창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이곳이 경찰서로 사용되면서 대나무는 대부분 잘라냈다고 합니다.

멀리서 본 환벽당. 푸른나무로 둘러싸여 있네요

송강 정철이 16살에 아버지를 따라 이곳을 지나다가 환벽당 아래의 하천에서 미역을 감고 있었는데, 이때 김윤재가 꿈을 꾸기를 용 한마리가 승천하는 꿈을 꾸고, 내려가 보니 정철이 놀고 있어서 데려와 공부를 시켰다 합니다.

정철이 미역감은 낚시터

정철이 미역을 감은 이곳은 당시 선비들의 낚시터로 두 그루의 소나무와 함께 조대쌍송이라 불리며, 정철의 성산별곡에 등장하는 유서깊은 곳입니다. 조대쌍송 기념비의 뒷면에도 글귀가 있음을 기억하세요.


환벽당 안쪽으로 걸음을 더하면 취가정이 있습니다. 정자는 대부분 풍류, 휴식, 교육 등의 목적으로 짓는 반면 이 취가정은 김덕령 장군을 위로하는 추모의 목적으로 지어진 정자라고 합니다. 한국전쟁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손이 다시 지었답니다.

취가정

취가정 비문의 취시가



김덕령 장군과 같이 공부했던 석주 권필이 하루는 꿈을 꾸는데 김덕령 장군이 꿈에 나타나 자기의 억울함을 한탄하는 취시가를 읖조렸다 합니다.

술취해서 부르는 노래 듣는 이 아무도 없구나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취해서 노래해도 내 마음 누가 알까
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수 있기만을 원하노니라.

권필은 아래와 같이 화답하였습니다.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으나
장한 뜻이 중도에 꺾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없는 원한이여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어머니 상중에 상복을 입고 출정하여 왜군과 맞서 싸운 김덕령 장군의 충정이 한스럽고 서럽게 다가옵니다.


무등산 역사길은 여기서 끝납니다만, 이 근처에는 몇군데 더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습니다.
환벽당쪽으로 되돌아가 충효교를 건너면 가사문학관이 곧바로 나오고, 그 왼편으로 식영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광주광역시가 아닌 전라남도 담양군입니다.

충효교. 건너면 담양군

호수생태원 내부에 있는 사미탄

길가에서 바라본 식영정 입구 

언덕 위의 식영정, 성선별곡 시비문

식영정의 연못

가사문학관

식영정은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어른인 석천 임억영을 위하여 정자를 짓고, 바로 아래에는  서하당을 지어 생활하였다 합니다. 임억령은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등에게 시문을 가르쳤으며, 김덕령 장군의 3형제도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합니다.
임억령은 성산(별뫼)의 아름다운 풍경을 소재로 식영정 이십영과 서하당 팔영 등을 지었는데, 식영정의 진면목은 정자가 아니라 이 정자에서 내려다본 경치라고 합니다. 대부분 광주호에 가라앉아 있어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조대, 자미탄, 칠성바위 등의 흔적은 호수생태원에 가면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것은 식영정, 서하당, 성산(식영정의 뒷산으로 예전에는 별뫼)의 풍경을 노래한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가사문학의 대미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가마문학관에 가면 그 자취가 잘 모셔져 있습니다.

내친 걸음에 소쇄원으로 향하였습니다.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은 "한 동네의 세 개의 명승"이라 불리웁니다. 환벽당의 주인인 사촌 김윤제는 소쇄원의 양산보와 처남매 지간이고, 식영정의 서하당 김성원에게는 아저씨뻘(당숙)입니다. 소쇄원에 가보야 겠죠? ^^



소쇄원 양산보가 지은 정원으로, 스승 조광조의 올바른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기묘사화를 겪으며 왕의 무능과 주변의 무고에 의해 꺾여 결국 유배되어 죽게되는 것을 보고, 세속을 벗어나 은둔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던 곳입니다. 조선 최고의 정원, 담양 소쇄원에 따로 포스팅 하였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무등산 역사길 여행을 마무리 해야 할 시간입니다.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이 잘 꾸며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취가정과 김덕령 생가터는 저 역시도 이번 역사길 나들이에서 처음으로 알게된 곳입니다. 특히, 아무런 지식없이 찾는다면 그냥저냥 정자로만 알고 지나쳤을 취가정을 알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배움이었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187번 버스에는 저 혼자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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